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윙드 후사르 (문단 편집) == 활약상 == [[파일:external/wordwarriorsandiego.files.wordpress.com/husaria.jpg|width=600]] 역사상 최강의 [[기병]] 중 하나답게 전적도 굉장히 화려하다. 주로 나열되는 전적들만 해도 다음과 같다. * 대 [[스웨덴]]전, 1605년 키르홀름 전투에서 윙드 후사르 2600명이 기마돌격을 한 번 하여 [[스웨덴 국왕]] [[칼 9세]]가 직접 지휘하는 [[스웨덴군]] 기병 2500명과 보병 8300명 중 7600 ~ 8천 명이 전사했음 * 대 [[루스 차르국|러시아]]전, 4만 ~ 8만으로 추정되는 루스 차르국 군대를 상대로 전투, [[러시아 제국군|루스 차르국 군대]] 1만 ~ 3만 전사 * 대 [[오스만 제국|오스만]]전, 윙드 후사르 300명이 오스만군 1만 5천에 돌격, [[오스만 제국군]] 천여 명 전사 * 대 [[오스만 제국|오스만]]전, 윙드 후사르가 돌격하여 오스만군 3만 5천 명이 붕괴 * 대 [[코사크]] - [[타타르]]전, 코사크 - 타타르군 14만이 모인 부대가 괴멸적 타격을 받았지만, [[폴란드군]]의 손실은 700명 * [[1683년]], [[제2차 빈 포위]]전, [[빈(오스트리아)|빈]]을 최소 9만 ~ 최대 30만으로 추정되는 오스만군의 대병력이 포위하자, 윙드 후사르 1만 8천 명이 (후대에 ''''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[[기병]] 돌격''''으로 불리는) 전설적인 돌격으로 붕괴시킴 위 전적들을 자세히 설명해보면 보통 윙드 후사르는 [[스웨덴]], [[오스만 제국]]과 그 봉신국들[* [[크림 칸국]], [[왈라키아 공국]], [[몰다비아 공국]], [[트란실바니아 공국]].], [[모스크바 대공국]]-[[루스 차르국]]과의 [[전쟁]]에서 대활약했다. [[1514년]] [[9월 8일]] [[폴란드 왕국]]과 [[리투아니아 대공국]] 연합군과 [[모스크바 대공국]]이 겨룬 오르샤 전투에서는 1만 2천 ~ 3만여 명으로 모스크바 대공국의 병력 중 4만 5천 ~ 8만 명 중 1만 ~ 3만여 명을 전사시키고 3천 ~ 5천여 명을 [[포로]]로 사로잡은 적도 있다. 이후에도 다방면으로 활약하여 폴란드 국왕 [[스테판 바토리]] 사후, 막시밀리안 대공 휘하의 황실군이 침공해 오자 이 [[군대]]를 비치나(Byczyna)에서 패배시켜 막시밀리안 대공을 포로로 사로잡았으며, [[1600년]]에 스웨덴과 전쟁이 발발하자 역시 활약을 펼쳐, 벤덴(Wenden)[* 현재 [[라트비아]] [[체시스]].], 코켄하우젠(Kokenhauzen)[* 현재 [[라트비아]] [[코크네제]].], [[라크베레]](Rakvere), 비아위 카미엔(Bialy Kamien)[* 현재 [[에스토니아]] [[파이데]].] 등에서 대승을 이끌었다. 특히 [[1605년]] 스웨덴과의 키르홀름(Kircholm) 전투에서는 스웨덴군 1만 2천 명을 윙드 후사르 2500명이 돌격해 스웨덴군의 전열을 패배시킨 적도 있다. 이 전투에서 스웨덴군은 대략 '''60% ~ 80%가 [[전사]]'''했다. 말 그대로 [[학살]].[* 이 날 전투에서 스웨덴 제국 원수였던 레나르트손이 전사했고, 같이 참전했었던 스웨덴 국왕 칼 9세는 목숨만 간신히 건져 탈출했다. 그리고 [[포위]]당한 스웨덴군은 [[폴란드군]]에 의해 무참히 도륙당했다. 스웨덴군은 6천 ~ 9천여 명이 전사한 데 비해, 폴란드-리투아니아 연방군은 고작 100명 전사하는 경이적인 [[교환비]]를 보였다.] 그밖에 수많은 전투에서 활약했으며, 이 때문에 스웨덴은 윙드 후사르와 평지에서의 전투는 최대한 피했다. 이때의 안 좋은 기억을 바탕으로 스웨덴은 [[구스타브 2세 아돌프]]의 군제 개혁을 거쳐 강군이 되어 그니에프 전투에서 [[지그문트 3세 바사]]가 친정한 윙드 후사르 부대를 대파했고 [[30년 전쟁]]에서 맹활약했다. [[파일:external/ncache.ilbe.com/6f134b4a41b9469e33180246ae19eb1f.jpg|width=600]] 그래서 클루쉬노 전투에서 루스 차르국 - 스웨덴 연합군[* 당시 스웨덴은 프랑스계 귀족인 야코브 드 라 가르디가 이끄는 외국인 용병대가 주력이었다. 가르디의 용병대는 루스 차르국 군대가 병크짓을 저지른 것과 다르게 침착하게 윙드 후사르의 돌격을 막아냈으나 포병대와 보병 부대를 지원받은 폴란드군에게 뚫려 결국 용병대의 대부분이 항복하고 드 라 가르디는 겨우 목숨을 건져 탈출했다.]은 [[랜스]]에 대한 방책을 준비했지만, 이번엔 [[휠락]] [[머스킷]]을 들고서 [[카라콜]]을 구사한 데다가, 루스 차르국 군대가 뻘짓[* 당시 드 라 가르디가 했던 것 처럼 목책 방진을 세워 윙드 후사르의 돌격을 나름 막아내면서 버텼지만 러시아 측 지휘관인 드미트리 슈이스키가 반격을 가한답시고 라이터 기병대를 윙드 후사르의 정면에 꼴아박았다. 그 덕에 윙드 후사르는 이 라이터 기병대들에게 돌진을 시전하여 개박살을 내줬고, 기병대가 무참하게 쳐발리는 광경을 본 러시아 보병대는 겁을 지레 먹고는 모두 잽싸게 튀었다. [[지휘관]]인 드미트리 슈이스키는 물론이다!]을 하는 바람에 클루쉬노 전투는 폴란드의 대승으로 끝났다. [[파일:external/weaponsandwarfare.files.wordpress.com/3d0113e3112139e5435993ddf9fc49e9.jpg|width=600]] [[1620년]] 체초라 전투에서는 비록 전투 자체는 패배[* 당시 동맹이었던 [[몰다비아 공국]]이 오스만 제국에 붙으면서 [[배신]]을 때렸고(다만 더 따지고 들어가면 몰다비아 공국은 150년 가까이 오스만의 봉신국이었다가 폴란드의 회유로 잠시 등을 돌렸던 것이기 때문에, 마냥 배신이라고 하기도 무엇하다), 폴란드-리투아니아 연방 의회에서 전쟁 예산을 일체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물자가 딸렸었다.][* 이 전투에서 [[지휘관]]인 스타니스와프 주키에브스키가 전사했고, 스타니스와프 코니에츠폴스키, 미코와이 포토츠키 등 폴란드의 걸출한 무장들 대부분이 오스만 제국의 포로로 끌려갔다. 주키에브스키는 이전의 클루쉬노 전투에서 루스 차르국 - 스웨덴 연합군 3만 5천 명을 박살냈었던 명장이었다.]하기는 했으나, 윙드 후사르 300명이 [[오스만 제국군]] 1만 5천 명에게 돌격하여 피해 1천여 명을 입히고 격퇴시키기도 했고, 1621년 코침 전투에서도 몰려드는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. 하지만 길이를 늘리기 위해 속을 파낸 가벼운 [[랜스]] 탓에 스웨덴의 [[중보병]]을 상대로 고전하기도 했다. 1620년대 폴란드 후사르와 스웨덴 보병대가 맞부딛친 전투에 대한 한 기록을 보면 후사르의 랜스가 스웨덴 보병의 판금 갑옷을 관통하지 못해 후사르들이 고전했다.[* 현존 유물을 보면 윙드 후사르의 랜스는 길이가 5m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드문데, 이 중에 3kg를 넘어가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한다. 본래 돌격용 랜스는 적을 맞춰서 부러지는 것이 일반적이긴 하나, 후사르가 쓴 랜스는 기존의 랜스 들보다도 내구도가 떨어졌다.] 또한 후사르들 자체도 [[갑옷]]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한 시기가 있어 '경무장한 폴란드 군인과 중무장한 스웨덴 군인'이라는 비교가 나오기도 하였다. 이 문제는 후대의 [[얀 3세 소비에스키]] 재위시기에 가면 많이 해결되었다. 물론 무장이 가벼운 병력들을 상대할 때에는 언제나 탁월한 전과를 보였다. 1660년 루스 차르국과 치른 한 전투에 대한 기록을 보면 후사르가 랜스로 루스 차르국 보병 6명을 일격에 꿰뚫었다고 하고 코침 전투에서도 [[오스만 제국]]의 기병인 [[시파히]] 6명을 한번에 꿰뚫었다.[* 다만 당시 시파히들은 일반적으로는 경무장을 했다.] 그렇게 윙드 후사르는 동유럽 평원의 [[쑥|쑥밭]] 재배자로 [[유럽]] 전역에 그 이름을 널리 알렸으며, [[카자크]] 헤트만 [[보흐단 흐멜니츠키]]가 이끈 코사크 대봉기 당시 있었던 1651년의 베레스테츠코 전투에서는 카자크 - [[타타르]] 연합군 14만이 괴멸당했다. 이 때 카자크 - 타타르 연합군의 피해는 전사 3만 ~ 7만. 그런데 폴란드 측의 피해는 700명이다. [[1673년]] 오스만 제국의 폴란드 침공 당시에는 코침 전투에서 오스만군 3만 5천을 상대로 승리하는 등 활약했다. [[17세기]] 말 당시에는 [[합스부르크 제국]]의 심장 [[빈(오스트리아)|빈]]을 공성 중인 [[오스만 제국]]의 군대를 기습 돌격해 승리를 거두었다. [[제2차 빈 공방전]] 문서 참조. 그러다가 [[폴란드 분할]]과 창기병의 쇠퇴. 거기에다가 [[대북방전쟁]] 당시 [[칼 12세]]가 이끄는 스웨덴군과의 전투에서 한계가 드러나게 되자, [[1775년]] 윙드 후사르는 정식으로 해체되고, 얼마 안 가 폴란드도 찢어진지 얼마 안 가서 그들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. 이후 [[프랑스 제1공화국|프랑스]]의 [[나폴레옹 보나파르트]]가 사실상 후손인 [[울란]]을 만들었다. 물론 중기병급 무장인 윙드 후사르와 달리 울란은 기동성을 살린 경기병이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